온조, 역사 속 흥미로운 떡밥들 풀어보기

백제를 세운 온조왕 - 백제를 세운 온조왕에 관한 재미있고 역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감동을 담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동화이야기
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떡밥 소개(문헌적인 측면에서)

온조, 백제의 시조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죠. 하지만 막상 온조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역사책에서 잠깐 봤던 기억만 떠오르시나요? 오늘은 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문헌을 통해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온조는 고구려의 주몽의 아들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사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역사 기록들은 온조의 탄생에 대해 다소 모호하게 이야기합니다.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설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후비인 소서노에게서 온조와 비류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죠.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언급이 없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소서노와 함께 한강 유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 또한 존재합니다. 온조의 출생에 대한 기록이 모호하고, 주몽이 소서노를 버리고 고구려로 떠난 후 온조와 비류가 태어났다는 점이 이러한 설을 뒷받침합니다.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 소서노의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흥미로운 점은온조의 왕위 계승에 대한 기록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는 비류와 함께 백제를 건국하고 비류가 위례성으로 가자 온조는 한강 유역에 남아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온조가 비류보다 나이가 많아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의 차이점은 온조와 비류의 나이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위치 또한 논란의 대상입니다.삼국사기는 온조가 한강 유역에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는 온조가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례성이 한강 유역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기록은 백제의 건국 위치에 대해 다른 표현을 사용했을 뿐 같은 장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떡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온조는 백제를 건국한 후 왕위에 올랐지만, 왕위를 계승한 과정에 대한 기록은 모호합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후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온조가 자신의 동생에게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조는 백제를 건국한 후에도 고구려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백제의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온조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백제의 영역을 축소했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온조와 고구려의 관계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변화해 왔습니다.

“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떡밥은 문헌적인 측면에서 더욱 심층적으로 파헤칠 수 있습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다양한역사서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온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끊임없이재해석되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온조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백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FAQ

Q. 온조는 정말 주몽의 아들일까요?

A.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설은 삼국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언급이 없고, 온조의 출생에 대한 기록이 모호하여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존재합니다.

Q. 온조는 어떻게 백제를 건국하게 되었나요?

A.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는 비류와 함께 백제를 건국하고 비류가 위례성으로 가자 온조는 한강 유역에 남아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온조가 비류보다 나이가 많아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의 차이점은 온조와 비류의 나이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Q. 온조는 백제를 어디에 건국했나요?

A. 삼국사기는 온조가 한강 유역에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는 온조가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례성이 한강 유역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기록은 백제의 건국 위치에 대해 다른 표현을 사용했을 뿐 같은 장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Q. 온조는 어떻게 왕위를 계승했나요?

A. 삼국사기에서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후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온조가 자신의 동생에게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조의 왕위 계승에 대한 기록은 모호합니다.

Q. 온조는 고구려와 어떤 관계였나요?

A. 온조는 백제를 건국한 후에도 고구려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백제의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온조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백제의 영역을 축소했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온조와 고구려의 관계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변화해 왔습니다.

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떡밥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새로운 해석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주제입니다. 앞으로도 온조에 대한 더 많은흥미로운 떡밥들이 발견될 것을 기대합니다.

백제를 세운 온조왕 - 백제를 세운 온조왕에 관한 재미있고 역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감동을 담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동화이야기
백제를 세운 온조왕 – 백제를 세운 온조왕에 관한 재미있고 역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감동을 담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동화이야기

1. 온조 이야기


 이번에는 문헌을 주격으로 다음에는 고고학을 주격으로 삼을 생각임. 

우선 내가 책 여러 권 읽고 생각한 결론은 온조를 믿는 것은 신앙에 가깝다고 생각함. 나는 온조가 실존한다고 믿는다. 근데 온조가 실존했다는 근거는 딱히 없다.

 이거는 온조 집단을 긍정한 책들 위주로 읽었음에도 온조가 실존했다고 믿기 어려운 게 많은 기록들은 오히려 온조한테 독이 되고 고고학이 온조의 존재를 계속해서 부인하는 느낌이 든다. 나머지는 비류임. 

1-1. 이 글의 특징과 알아야하는 점

 피드백 받아들여서 글 짧게 쓴다고 했고 이렇기에 고고학과 비류는 나눠 적기로 했는데 이게 쓰다보니 너무 길게 됐다. 나눠서 읽으면 될 듯.

 이 글의 특징으로는 학설이라고 소개는 했는데 사실 학설보다는 그냥 내가 백제 책이랑 신화 책 내 ㅈ대로 섞은 견해다. 또한 온조에 대한 학설은 정답이 없다.  

 이렇기에 댓글로 네 주장은 틀렸다라고 주장하는 건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 만약 내가 사실 자체를 왜곡했다면 마땅히 비판 받아야겠지만 학설 자체로 비판 받는 건 부당함. 온조 관련은 ㄹㅇ 답이 없기 때문

 마지막으로 나는 일단 온조가 실존한다고 전제하는 책들을 더 많이 읽었고 그쪽 관련 논문들도 봤다. 그런데 결론은 역사적 온조는 실존하지 않는다. 

2. 기록이 가장 많으면서 가장 적은 왕

 온조의 실존 여부에 대해 넷상 여러 글들은 고고학 vs 문헌 이런 식으로 설명하려는 글들을 많이 봤음. 그러한 접근 방법은 좋은 방법이지만 문헌 vs 다른 문헌으로 고찰한 글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삼국사기 온조의 대표적인 기록을 보면 마한 정복, 정치, 동명왕 사당, 하남 위례성임

여기서 마한 정복은 확실히 후대의 일이기 때문에 거르고 정치적인 문제도 후대 백제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온조대로 안보는 게 맞음. 애초 온조 실존 여부도 불분명한 판국에 이러한 게 나오는 것도 좀 그렇지.

 하남 위례성 천도 같은 경우에도 하남 위례성을 풍납토성으로 보는 견해를 채택하면 애초 천도 같은 거 없이 하남 위례성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고 발굴 조사로 인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동명은 아래에 서술

 삼국사기 온조 기사를 보면 사실상 죄다 후대 범벅이고 온조 당대에 했다는 기록은 전무한 실정이라 기록 많은 게 의미가 없음. 

 또한 백제 관련 기록에서도 온조는 안 나온다. 실제로 동명묘와 우태묘는 있는데 온조묘와 비류묘는 없다. 이거에 대해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가 동명왕 사당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구태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또 온조가 ㄹㅇ 내려온 실질적인 시조라면 온조묘가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는데 백제 기록 보면 구태묘가 있지. 온조묘는 없다.

 당장 일본 기록에서도 부여 계통을 말하고 있음. 이는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온조 설화랑은 정면으로 배치되고 중국 기록에서도 구태는 있어도 온조는 없음. 이렇기에 온조라는 인물 자체가 백제 멸망 이후에 나왔을 가능성도 완벽히 배제하기는 힘듦. 

 그니깐 온조 기록은 후대에 소급 된 티가 너무 많이 나는 것도 문제인데 당대 외국 기록으로 살펴봐도 온조는 없고 개로왕의 국서 등등 여러 사료를 봐도 온조라는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음. 신찬성씨록에서도 속고왕과 귀수왕은 있어도 온조는 없다. 신찬성씨록은 일본에 살던 백제 왕족의 후예들에 관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기에 백제사에서 중요한 자료인데 없어. 

 이 정도면 당대 백제인들이 온조를 알았는가로 넘어가야함. 

3. 신화로 보는 온조의 실존 여부

※ 중국 신화

 온조가 비류와 같이 내려왔다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온조 집단이 고구려에서 내려온 것은 사실로 보임. 이쪽 내용은 고고학쪽에서 다루겠음. 그런데 이러한 온조 신화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 삼황오제를 비롯해 신화적인 인물이 부인되는 대표적인 논리 중 하나가 오래 될수록 후대 역사서에 나타나는 경향을 보임. 그니깐 보통 찐으로 오래됐다면 이미 진작에 나왔어야 하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가 길어진다. 이건 실존했다는 증거가 아닌 후대로 갈수록 윤색이 들어갔다고 봐야함.

 이건 온조도 동일함.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백제 건국 년도를 기원전 18년으로 지목하고 있으나 이건 온조 긍정하는 쪽에서도 부인 됨. 왜냐면 고고학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임. 

 기록상 온조라는 이름이 나온 시대가 고려 시대인데 중국 요순과 마찬가지로 후대로 갈수록 백제의 역사도 길어지고 있기 때문임.

 기원전 18년이면 토광묘 세력이 들어오기 몇백년전인데 이 당시 온조가 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잡았다? 심지어 그 정도 대업적을 이룩한 왕이 업적은 죄다 후대 왕 업적이고 묘도 제대로 없고 당대 기록으로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온조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 

 온조=구태를 주장하는 학설이 있긴 한데 주류는 아닌 걸로 기억함. 오히려 위구태나 고이왕을 구태로 보는 견해가 더 강할걸. 구태 나온 중국 사서가 백제 건국되고 좀 뒤 시점이라 구태를 중시조로 보는 시각도 제시됨. 근데 구태가 시조가 아니라 중시조라고 쳐도 그게 온조가 존재한다로 이어지는 건 아님. 

※ 고구려 출자설도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 

 일단 근본적인 문제점은 고구려와 백제가 사이가 안좋은데 고구려 출자설이 백제 당대에 있을 지는 알 수 없다는 거임. 구삼국사가 백제 멸망인데 정치적인 목적이 들어가서 백제와 고구려가 한 가족이라고 표현했다는 가설이 제기 됐고 내가 지지하는 학설임.

 백제 초기부터 고구려 출자설을 주장했을 거 같지는 않음. 왜냐면 백제 역사를 문자로 적은 시기가 근초고왕이고 그 전에는 구비전승일텐데 구비전승은 시간 지나면서 왜곡도 심하고 소실된 것들도 많았을 거임. 결정적으로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전쟁을 한 왕이기 때문에 근초고왕 시기에 편찬된 사기를 봐도 고구려 출자설이 나올 가능성은 적다고 보임. 

 당장 당대 백제인들이 하는 소리들 기록 싸그리 모아보면 고구려가 아닌 부여출자설을 주장하고 있음. 생각해보면 당연한거지. 적국인 고구려에서 나왔어요라고 주장할 이유는 없는데 온조 설화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근초고 이후 백제 역사를 보면 계속 고구려와 대립했기에 고구려 출자설 주장할 이유 없다. 영양왕 때 마지막으로 백제 치고 영류왕 시기부터 자제하고 개소문 시기에 개소문이 대신라강경책 펼치면서 의자왕과 합이 잘 맞았으나 문제는 의자는 백제 마지막왕이라는 점이다. 

 온조 실존을 긍정하는 쪽도 실질적인 시조는 다 다른 왕으로 봄. 고이왕 비류왕 근초고 등등으로 보고 있으며 삼국사기 온조 내용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는 거의 못봄. 식민사학 극복하겠다고 백제 년도 끌어올린 것도 기원전까지 안감 


 이건 순수 내 뇌피셜인데 아마 부여출자 주장한 이유도 고고학적인 이유보다는 그냥 고구려와 대등하다고 알리고 싶어서 그런 거 같다. 부여출자는 당시 백제 배경을 보면 이유라도 있는 거 같은데 고구려는 ㄹㅇ 이유 없다. 

※ 주몽의 아들은 아닐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온조 비류 형제를 잘 살펴보자. 주몽의 아들이라는 것은 현재 거짓이 거의 확실해보인다. 온조 비류 이야기는 고구려 기록에 없다. 아니 심지어 유리명왕 역시도 주몽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다수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미 제기 된 문제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주몽을 비롯한 고구려 1~5대왕은 허구 인물이라는 설이 제시되고 있고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초기 왕들이 실존했다고 쳐도 왕위계승은 윤색됐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6대 태조대왕 시절에 다시 형제계승으로 돌아가는데 기록으로 따지면 고구려 1~5대는 부자인 반면 갑자기 6대 들어서 퇴화할 이유가 없기 때문

 이렇기에 고구려 1~5대는 영웅적 왕자관에 입각했다고 보고 있음. 지금 발전한 사학계에서는 유리명왕이 ㄹㅇ 주몽 아들인가부터 부정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기록에 나오지 않는 온조 비류를 주몽의 아들로 보기 어렵다. 

 설화에서는 부자계승이 강조되어 있는데 그건 오히려 후대에 윤색된 이야기라는 결정적인 증거

 또 삼국사기에 온조 업적이 몰려있다는 점에서 백제인들한테 중요하게 인식된다 이런 것도 봤는데 백제인들이 중요하게 인식했다면 왜 묘는 안 만들어주고 왜 일언반구 언급도 안되는지… 멸망 후 온조 설화가 만들어지면서 소급 된 게 아닐까 싶다. 

결정적으로 온조가 실존했다면 대체 몇 세기 사람임? 

 이거 고고학 이야기인데 2021년에 권오영 교수님도 이걸 지적했는데 21세기에 급증한 고고학 성과 덕분에 백제 국가형성에서 삼국사기의 가치보다 삼국지의 가치가 더 높은 게 판명됐고 따라서 기원전 18년 부여 고구려 이주민인 온조에 의해 백제가 건국 되었다는 과거의 믿음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고 강력한 일침 날리셨다. 

 백제는 소수의 건국자들에 의해 주도된 게 아니라 여러 정치체 사이에서 전개된 것임을 인정해야함. 

여기 논문에서는 온조라는 개인 주체에 의해 건국된 게 아니라는 건 상식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한다라고 표현

-진짜 알려지지 않은 사실

 설화 어그로 끌려서 그러는데 보통 백제 건국 설명할 때 고고학 증거로 고구려에서 내려온 애들이 세웠다고 주장하는데 이거 정설 아니다. 물론 나는 고구려에서 내려왔다고 보는 입장인데 물증이 그렇게 충분하지 않다.

 백제는 본인들이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하는데 고구려도 물증 부족한 판국에 부여는 더더욱 부족하다. ㄹㅇ 만약에 고구려에서 내려온 애들이 주격도 아니라면 온조 설화 관련 내용은 그냥 맞는 게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온조의 실존 여부를 또 다시 의심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 중국 하나라는 실존합니까? 

 온조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갈수록 그 진위여부가 부인되고 있다. 그 근거를 제출하겠다. 우선 위에 언급 된 풍납토성이 기원전 1세기에 건축됐다는 증거가 발견됐다고 온조도 있다는 내로남불이다.

 이것이 왜 내로남불이냐면 중국이 주장하는 단대공정을 보자. 사실 상나라 이전에 중국이 적어도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고고학 증거는 확실하다. 얼리터우도 실존하며 그 가치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라가 확정되지 않은 이유는 그 유적이 하나라라는 증거가 없다.

 마찬가지로 100% 확실한 팩트는 백제 유역에 많은 애들이 내려왔다는 점이다. 이렇기에 풍납토성이 기원전 1세기부터 건축됐다고 해도 그게 온조라는 증거는 없으며 백제가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풍납토성에 이거 온조가 세움 이정도 나오지 않는 이상 믿기 어렵다. 

 이렇기에 온조가 정치적인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나왔다고 생각한다. 

또 유리명왕 시기에 내려온 애들이 온조 집단이 아닌가라는 학설도 봤지만 근거 없다. 왜냐면 이것도 하나라의 사례처럼 그 집단이 온조 집단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논리라면 중국에서도 상나라 이전 문화 같은 게 발견되니 요 순도 긍정해야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유적에 요 순이나 하나라에 대해 갑골문 같은 게 나오면 이들이 역사가 될 수 있지만 안나오잖아. 

※ 온조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

 만약 내가 하(夏)나라는 거짓이다. 얼리터우는 실존하지만 그게 우임금의 하나라라는 근거가 없으니 하나라는 실존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말했으면 공감 받을 것이다..

 요 순을 부정해도 한국 네티즌들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왜냐면 그것은 신화이기 때문임. 그런데 이상하게도 박혁거세, 김수로, 온조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면 바로 선족이 취급 당하거나 사이비 역사학 퍼트리는 사람 취급 당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진지하게 온조를 실존 인물로 볼 근거가 충분한가? 역사 온조보다 신화적인 요소가 강조된 온조가 주격인 게 팩트이며 맞는 부분은 극히 적다. 내가 모든 온조 자료를 본 것은 아니지만 당장 온조 긍정하는 쪽에서도 온조 집단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설명함. 

 온조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와 하나라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논리가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다. 하나라 실존 논리가 일단 유적 발견됐으니 사실, 일단 기록(후대 기록)에 있으니 사실, 일단 중국에 사람 있었으니 사실 이런 논리다.

 온조도 풍납토성 기원전 1세기 흔적 있으니 사실, 일단 후대(당대 기록에 없지만) 기록에 있으니 사실, 일단 내려온 애가 온조라는 근거는 전혀 없지만 아무튼 온조임. 거기에다가 온조는 고구려 출자설이나 역사서인 삼국사기 기록들도 죄다 후대 왕 업적 온조한테 올인한 게 밝혀졌기 때문에 우 임금보다 더 불리함. 

 상나라나 낙랑 같은 경우에는 대놓고 갑골문, 낙랑이라고 적힌 유물 나와서 그 존재가 입증되었다.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 

4. 그렇지만 간과하면 안되는 점

 이런 신화적인 성향이 짙은 인물 토론할 때 나오는 무적의 논리가 하나 있음. 

어떤 인물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임. 

그니깐 온조 비류가 가상인물이라고 쳐도 그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고 분명 애들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있을 거임.. 

 유리 이야기하자면 근초고왕 시기와 유리명왕 대 내려왔다고 추정한 애들이 동일집단인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임. 

 또 온조가 남하했다고 쳐도 기록 굳이 따지면 흘우 세력, 진씨 등등 여러 세력들이 혼합했으며 삼국사기 백제 초기 왕들의 나이가 비정상적임을 감안해보면 애들도 고구려처럼 100% 주작 있기에 온조 자체에 신빙성이 그렇게 높나 싶다.

그리고 또 고대사 시기 건국에 대해 오해하면 안되는 점은 어떤 인물이 오늘부터 00국을 건국한다라고 했다고 건국되는 것이 아니다. 애들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건국된다고 봐야 한다. 또 3세기 중엽까지 계속해서 내려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지. 

 거기에다가 몰락한 형 이름까지 나와있음. 심지어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백제의 미추홀 진출은 아무리 아무리 빠르게 봐도 기원후임. 이쯤되면 온조 이야기 자체에 역사적 진실이 하나도 없는 수준…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게 확실하다. 

 그렇지만 유리명왕 시기 내려온 세력을 온조 세력이라고 부르는 건 ㄱㅊ다고 생각함. 편의상 네이밍하는 정도라고 보면 되지. 

6. 결론

 이제 결론을 내야 하는데 우선 내 입장은 이럼. 근데 이것도 정설은 아니다. 온조 자체가 워낙 미스테리하고 사실상 신화 속 인물이라 정설 같은 거 없음.

 우선 나는 적어도 온조 설화 자체는 백제 멸망 이후로 보고 있다.  왜냐면 온조가 당대 기록에 나오지도 않고 백제가 본인은 부여에서 나왔다고 확고히 주장했으며 또 타문헌이나 고고학적으로 맞는 부분이 진짜 거의 없기 때문임. 그리고 고구려에서 나왔다가 백제왕들이 주장할 수 있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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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떡밥 소개(문헌적인 측면에서)

온조 이야기, 문헌 속에서 찾아낸 흥미로운 떡밥들

온조 이야기, 흥미롭죠? 이번에는 문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볼 거예요. 다음에는 고고학적인 측면을 살펴보고 싶은데, 먼저 책을 탐독하면서 느낀 점을 말씀드릴게요. 여러 책을 읽고 나니 온조를 믿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온조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넘어, 우리 민족의 기원과 정체성을 탐구하는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에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고대 문헌에서 온조는 백제의 시조로 등장하지만, 그의 실존 여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에요.

역사학자들은 온조 이야기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전설적인 요소를 분리하여 분석하려고 노력해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신화에는 온조와 주몽의 형제 관계, 그리고 백제의 건국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와의 갈등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어요.

특히 온조의 건국 신화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초기 고대 국가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요. 온조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백제를 건국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중시했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기도 해요.

하지만 온조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아요. 고대 문헌은 사실과 전설이 뒤섞여 있고, 고고학적 증거도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온조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죠.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고찰을 통해 온조 이야기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동맹과 국익 수미 테리와 로버트 김 사건

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문헌 속에서 찾아보는 진실

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흥미로운 떡밥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문헌적인 측면에서 온조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조는 고구려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주몽의 아들이자 고구려의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온조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몇몇 문헌에만 나타나며, 그 내용 또한 신화적인 요소가 많아 역사적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온조가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건국을 이룬 주몽의 아들로,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이동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류는 한강 유역에 정착하려 했지만, 온조는 위례성 (현재 서울 송파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는 온조가 남한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온조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온조가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하며, 백제 건국에 대한 신성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온조는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나라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문헌적인 기록만으로는 온조의 실존 여부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넘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동맹과 국익: 수미 테리와 로버트 김 사건의 연결고리

온조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고대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여줍니다. 이와 유사하게 수미 테리와 로버트 김 사건은 미국과 한국의 동맹 관계 속에서 국익과 개인의 신념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수미 테리는 미국 정보기관에서 활동하던 여성으로, 북한 정보원과 접촉하며 기밀 정보를 넘겨준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로버트 김은 미국 정보기관에서 북한 관련 정보를 담당했던 인물로, 수미 테리와 관련된 기밀 정보를 한국 정부에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건은 미국과 한국의 동맹 관계 속에서 국익과 개인의 신념이 충돌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수미 테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북한 정보원과 접촉했지만, 미국 정보기관의 기밀을 넘겨줌으로써 미국의 국익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로버트 김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수미 테리와 관련된 기밀 정보를 한국 정부에 제공했지만, 이는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 유출로 이어져 미국 국익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수미 테리와 로버트 김 사건은 동맹 관계 속에서 국익과 개인의 신념이 충돌하는 상황이 얼마나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국가 간 동맹 관계의 의미와 개인의 신념이 국익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즉위 조 – 우리역사넷

백제 건국 신화, 온조와 비류 이야기: 누가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까울까?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즉위 조를 살펴보면, 백제 건국 과정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 즉 온조와 비류의 전승이 등장합니다. 두 전승은 서로 다른 백제 건국 이야기를 담고 있고,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온조 전승은 온조가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운 이야기로, 비류 전승보다 건국 과정에 대한 내용이 더 풍부합니다. 이는 온조 전승이 후대에 비류 전승보다 더 많이 확산되고 발전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곧 온조 전승이 비류 전승보다 역사적으로 더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 전승 모두 고대 백제 건국에 대한 구전 전승을 바탕으로 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온조 전승은 백제 왕실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제 왕실은 자신들의 조상인 온조를 백제 건국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온조 전승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반영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비류 전승은 온조 전승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략하지만, 미추홀이라는 지역을 언급하며 백제 건국 초기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미추홀은 오늘날의 인천 지역으로, 백제가 한반도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결론적으로 온조와 비류의 전승은 백제 건국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두 전승 모두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각 전승에 담긴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고 비교함으로써 고대 백제 건국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백제/역사

백제와 부여의 관계: 고고학적 증거가 말해주는 이야기

문헌 기록만으로는 백제와 부여의 관계를 확실하게 단정 짓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이 두 나라의 관계가 생각보다 깊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백제와 부여의 문화적 교류가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백제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부여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습니다. 특히 백제의 대표적인 유물인 금동관과 금제 장신구는 부여 유물과는 확연히 다른 양식을 보여줍니다. 이는 백제가 부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백제의 주요 고분에서도 부여 문화와의 연관성을 찾기 힘듭니다. 백제 고분에서는 독특한 벽돌 무덤과 돌덧널 무덤이 발견되는데, 이는 부여 고분에서 발견되는 돌무지 무덤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입니다. 이는 백제가 부여의 장례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백제와 부여 사이에 완전히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일정 수준의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백제가 부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나라가 아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백제는 부여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고대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백제는 고유한 문화와 정치 체제를 구축하여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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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 이야기: 역사 속의 진실을 찾아서

온조 이야기는 한국 역사에서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특히 온조가 고구려를 건국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합니다. 하지만 온조 이야기에는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온조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고구려 건국에 실제로 기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오랫동안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온조에 대한 기록은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에 나타나지만, 이 기록들은 모두 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됩니다.

특히 온조 이야기에서 법원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법원 증거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자료와 고고학적 증거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온조 이야기의 경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고구려 초기의 유물과 건축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온조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고구려 건국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명확하게 밝혀낼 수는 없습니다.

온조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뒤섞여 전해져 내려오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온조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고구려 건국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온조 이야기는 한국인들의 정체성과 역사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이야기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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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온조에 대한 흥미로운 떡밥 소개(문헌적인 측면에서)

백제를 세운 온조왕 – 백제를 세운 온조왕에 관한 재미있고 역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감동을 담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동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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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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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공부] #17.온조왕, 백제의 건국 시조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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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화 속 역사탐방] 온조는 평야 너른 하남에 도읍을 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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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문화대국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 시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K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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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 온조의 백제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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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온조 그리고 소서노 - 광나루 - 한강역사이야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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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 온조의 백제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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